공공디자인과 글로컬 미학
어떤 일에 대한 지적이나 비판은 그에 대한 답보다 쉽기 마련이다.
간판이 도시 미관을 해친다고 하여 공공디자인의 이름으로 그것을 고치자 했던 디자이너들이나, 그렇게 바꾸어 단 간판들의 모습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또 다른 디자이너들 사이에 공론이 여전한 이유다. 새로 바뀐 상가의 간판들로 인해 도시의 풍경은 획일화되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그동안 숨겨왔던 건물의 너저분한 속살마저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미리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과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들, 양쪽 모두 뾰족한 대안이 없기는 마찬가지로 보인다. 이는 정치가나 행정 책임자의 마인드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최고의 예술이 어린아이의 놀이와 무관하지 않듯 거리 간판의 경우도 정작 중요한 글꼴이나 그 전달이라는 원초적인 문제가 간과된 채 잘 될 리가 없다. 환경디자인이니, 한글화 작업이니 하는 디자이너들의 거시적인 명제들이 결국은 돈이나 명분에 따르고 있는 건 아닐까 의구심을 가져본다. 도심의 뒷골목이나 시장 안, 한적한 지방의 길모퉁이와 기차역 구내 등에서 배운 것 없이 주섬주섬 자기 손으로 쓰고 그려 만든 간판과 안내문을 들여다보면서 디자이너들이 놓치고 있는 해법을 찾아보려는 것은 잘못일까?
▲ 무의도의 한 슈퍼 벽면
육지에 가까워 여행객이 많은 섬에서는 민박과 펜션의 안내글과 전화번호 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들 섬의 '공공디자인(?)' 대부분은 누구의 지원이나 전문적인 도움 없이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된다. 벽면에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글자들은 지나는 행인들에게 파는 물건과 서비스의 내용을 알려준다. 어떤 것은 스텐실 기법으로, 어느 것은 직접 페인트로 그리거나 커팅시트로 오려붙이기도 했다. 더욱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글자에 담긴 세심한 표현력이다.
'민박'과 '슈퍼'라는 주요 업종을 알리는 글자를 전화번호까지 모두 기존의 서체를 사용했고, 낚시와 아이스크림 등 병행(?)하는 서비스는 직접 그린 글자다. 중요도에 따라 글자를 선택하는 안목이 숨겨져 있다. '아이스크림'과 '얼음'은 고딕체 대신 녹은 얼음을 연상하게 하는 감각을 발휘했다. '커피'는 갈색으로 썼다. 목적과 심미적 판단에 근거한 타이포그래피의 원형이라고 하면 지나친 칭찬일까?
▲ 한 중학교 앞 분식집의 POP(왼쪽)과 그에 맞추어 기존 서체의 윗부분을 고쳐본 예(오른쪽).
글자의 모양은 시대와 필요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알파벳의 소문자, 한글의 탈네모꼴도 그런 변화의 한 예일 것이다.
하지만 한글 쓰기와 디자인은 여전히 경직된 계몽적 사고에 매어있는 것 같다.
학자나 디자이너가 아니라 민간의 손에 그 해법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한 중학교 앞 분식집의 안내글이다. '들'과 '먹', '감', '맛' 등의 글자들이 흥미롭다. 한글 탈네모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디자이너들은 종성(받침)을 틀밖으로 빼내는 용감함을 보여주지만 어진 백성들은 여전히 네모틀 안에서 그 받침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다.
번번이 글자의 세로 공간에 어려움을 안겨주는 'ㄹ'이 유쾌하게 춤을 추고 있고, 'ㅅ'도 굳이 염치를 차리지 않고 초, 중성 사이로 정렵게 끼어든다. '흔', '치' 등의 글자를 보면 히읗과 치읓의 위쪽 삐침획이 알파벳의 네모틀을 벗어나는 어센더 역할의 가능성도 보여준다. 이들은 받침을 비대하게 보여주는 탈네모꼴 서체의 문제들을 그리 고민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현명하게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나아가 오히려 받침의 크기가 작은 것은 읽는 데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멋진 한 수를 디자이너에게 가르쳐 준다. 한글 '모아쓰기'는 네모틀과 탈네모틀이 아니라 '주어진 공간에서 획과 형태를 얼마나 조화롭게 머물게 하느냐'가 관건이라는 사실 말이다.
▲ 주한미군의 자동차 표지판
주한미군의 자동차 번호판은 이방인의 눈에 비친 한글의 구조를 증언한다. 미군들의 번호판 제작과정을 알 수는 없지만 한국 사람이나 업체에 맡겨 만든 것 같지는 않다. 초성, 중성, 종성을 역삼각형 모양으로 모아 만든 글자가 외국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한'은 받침을 초성 바로 아래 놓고 중성을 옆에 뒀다. 받침이 초성과 중성 사이에 놓이는 것이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고, 마지막에 쓰이는 글자인 종성이 때에 따라 중성 바로 아래 놓이는 것이 더 논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초성과 받침은 같은 자음이니 이 방법이 어쩌면 시각적으로는 훨씬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주'의 'ㅈ'과 '군'의 'ㄱ' 모양이 유사한 것도 흥미롭다. 네모틀 모양에 얽매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초성의 위치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 이유도 없이 글자를 오르락내리락 배열하는 우리의 멋내기 감각에 비하면 한글 표기의 정석적 접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 일이다.
지금처럼 서체가 다양하지 않았던, 불과 이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간행물의 목차나 제목의 글자를 일일이 손으로 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솜씨 있는 전문가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직접 쓰고 그린 다양한 형태의 글자들은 복제 가능한 폰트로 만들어지는 밑그림이 되어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들의 유쾌한 감각과 해석, 서바이벌 아이디어는 글자 디자인을 풀어가는 일종의 민간 해법이 아닐까.
기사원문 - 타이포크래피 서울
http://www.typographyseoul.com/index.php?act=dispMediaPrintArticle&document_srl=17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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